마무리된🎗 기억합니다기타1964-12-31 업데이트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

다른 이름: 한강인도교 폭파 · 한강교 폭파

6·25 전쟁 중이던 6월 28일 이른 새벽 두 시 반, 국군의 손으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 같은 날 오전 여덟 시 무렵 북한군 전차 부대가 용산 삼각지 인근까지 밀고 들어왔다. 다리를 끊은 시점이 너무 앞섰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병력과 군수물자의 이동에 큰 지장이 생겼다는 비판이 나왔다. 미 군사고문단 소속 장교는 희생자를 500명에서 800명 사이로 보았으며,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는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77명이다.

그래서 지금은?한강교 폭파의 책임을 졌던 최창식 공병감은 같은 해 8월 28일 신병이 확보됐고, 9월 21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후 1962년에 재심이 시작됐고, 1964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사후에 명예가 회복됐다. 다만 실제 책임 소재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지금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설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타임라인 기록 6개

  1. 1950년 6월 28일보도됨

    한강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이른 새벽 두 시 반,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2. 1950년 6월 28일보도됨

    북한군 진입과 폭파 시점 논란

    그날 오전 여덟 시쯤 북한군 전차가 용산 삼각지 부근까지 나아갔다. 폭파 시점이 지나치게 이르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면서, 병력과 물자 수송이 큰 타격을 입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3. 1950년 8월 28일보도됨

    최창식 대령 체포

    적전비행죄 혐의로 최창식 대령이 붙잡혔다. 직접적인 계기는 경북 군위에서 발생한 지뢰 사고와 연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1950년 9월 21일보도됨

    최창식 대령 사형 집행

    최창식 대령에 대해 내려진 사형 선고가 군 당국의 손으로 집행됐다.

  5. 1962년보도됨

    재심 절차 개시

    최창식 공병감 사건에 대해 재심이 열렸다.

  6. 1964년보도됨

    무죄 확정과 사후 복권

    재심 끝에 최창식 공병감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사망 뒤 명예가 회복됐다.

이 사건, 잊지 않도록 기억해 둘까요?

앱에서 '기억하기'를 누르면 다음 전개가 나올 때 바로 알려드려요.

앱 출시 준비 중 · iOS / Android인스타그램에서 먼저 보기

이 사건의 일부 기록은 위키백과 문서(한강인도교 폭파)를 바탕으로 정리했어요. 위키백과에서 온 내용은 CC BY-SA 4.0 라이선스를 따르며, 같은 조건으로 다시 쓸 수 있어요.

국내외 언론·공식 기록·보관소를 대조해 AI가 정리한 기록이에요. 기사 본문·사진은 싣지 않고, 사실을 우리 말로 정리한 뒤 원문 링크를 붙여요. 저작권 침해 신고: 106ljune@gmail.com (받는 즉시 내려요). 확인됨=언론 2곳 이상·공식기록 일치, 보도됨=언론 1곳, 미확인=블로그·커뮤니티에만 있음. 중요한 내용은 출처에서 꼭 확인하세요. 잘못된 내용은 106ljune@gmail.com 으로 알려주세요.